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폰 만슈타인 (문단 편집) ==== [[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]] ==== [[파일:external/s-media-cache-ak0.pinimg.com/c6ec40bd84e5e720df7c09e8eac5f9f2.jpg|width=400]] ▲ 1943년 6월 동부전선을 시찰하는 만슈타인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승기를 잡은 소련군은 독일군이 약해졌다고 오판하게 되고 [[하르키우|하르코프]]를 탈환할 계획을 세우고 하르코프를 향해 대규모 공세를 가해 독일 A집단군을 포위 섬멸하려 했다. 일단 하르코프와 [[로스토프]]까지의 공격은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. 소련군은 여기서 공세를 확대하게 되지만 소련의 공세 역량은 이미 한계에 가까운 상태였다. [[1943년]] 2월 6일 만슈타인은 미우스 강을 연결하는 선까지 돈 집단군의 우익을 회복하라는 지시를 받고 남부집단군(B집단군 해체 후 돈 집단군의 명칭 변경)은 2월 20일부로 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%EB%B2%A0%EB%A5%B4%EB%84%88_%EC%BC%90%ED%94%84|베르너 켐프]]의 켐프 분견군을 투입하여 도네츠 분지를 확보하였다. 소련군의 공세가 캠프군과 제1기갑군 간의 간격으로 돌진하는 동안 2월 17일 만슈타인은 4기갑군 사령부를 로스토프에서 드네프르페트로브스크로 이전하였다. 2월 15일 프랑스에서 증원된 [[파울 하우서]]의 제2SS기갑군단은 히틀러의 사수 명령을 어기고 포위 격멸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르코프에서 철수하였다. 그 무렵 하르코프 공세를 주도하던 [[니콜라이 바투틴]]이 지휘하는 소련 남서전선군의 기동 전력인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Markian_Popov|마르키얀 포포프]]의 포포프 기갑군이 캠프 분견군과 제1기갑군 사이에 생긴 160㎞에 달하는 간격을 이용하여 [[드니프로 강|드네프르 강]]까지 도달함에 따라 남부집단군이 포위될 위험에 직면하였다. 그러나 이 시점에 소련군의 공세 역량은 한계에 달한 상황이어서 전력이 극도로 감소한 상황, 즉 [[공세종말점]]에 도달한 상태였다. 이에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에게 소련군 남서전선군을 격파하라는 역공격을 지시했다. 이 명령에 따라 제1기갑군 예하 제40 기갑군단은 북서쪽으로, 제2SS기갑군단은 동쪽으로, 제4기갑군 예하 제48기갑군단은 북쪽으로 진격함으로써 완벽하게 소련군을 기습적으로 포위 공격하여 대성공을 거뒀다. 그 결과 포포프 기갑군을 포함해 '''소련군 52개 사단은 전멸'''[* 그러나 소련군의 피해는 8만 명 정도로 당시 소련군 사단이 완전히 편제되었을 때 9,000명 정도의 규모인 것에 비하면 크지 않은 손실이다. 하르코프 공방전 당시 소련군 1개 사단의 인원은 3,000명 선으로 감소한 상태였다.]당하고 독일군은 시가전 끝에 하르코프를 재점령했다.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은 만슈타인의 천재성이 가장 잘 드러난 전투로 기동 방어의 모범으로는 첫째 손가락에 꼽힌다. 만슈타인의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대부분이 이 하르코프 전역에서 검증되었다. 알파캣이 그리는 [[월드 오브 탱크 역사웹툰]]에선 이 전투를 다루며 명장 만슈타인의 대승이라고 평하였다. [[https://worldoftanks.asia/ko/content/history/kharkov/|링크]][* [[구글 크롬]]이나 [[모질라 파이어폭스]]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